<정의당 비례대표 출마선언문, 김창인>
새로운 정의의 첫 번째 파도가 되겠습니다 - 우리 시대의 이름은 ‘민주적 사회주의’가 될 것입니다.
김창인
저의 이야기는 패배로부터 시작합니다.
스무살, 무너지는 정의를 목격했습니다. 2009년 평택 쌍용차 공장 앞에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폐쇄한 채 농성 중이었고, 그 가족들은 공장 앞에서 천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두 달 가까이를 공장 앞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새벽, 어수선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 봤던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환경미화원 복장을 한 용역깡패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폭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경찰의 방패를 붙잡고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을 때, 경찰은 방관할 뿐이었습니다. 공포를 압도하는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그 날 제가 목격한 것은 이 나라의 맨얼굴이었습니다. 국가는 억압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억압당하는 자들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라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으로 돌아가 제 경험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평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국가와 자본의 횡포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지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은 대자보 한 장 자유롭게 붙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사장은 “대학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산업”이라 말했고, “인문학은 구청문화센터에서나 들으라”고 떠들었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목을 치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은 대기업이 인수한 이후, 대학기업화의 선봉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학 내 모든 존재들을 그저 수익과 비용으로 계산했습니다. 취업률이 낮은 학과들은 폐지됐고, 노동자들은 비용감축을 이유로 비인간적인 처우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저항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대자보를 붙이고, 집회를 열고, 삭발을 하고, 단식을 했습니다. 본관을 점거하고 잔디밭에서 농성했으며,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한강대교에 올라 고공시위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근신, 유기정학 18개월, 무기정학 등의 징계폭탄으로 대답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졌지만 잘 싸웠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의가 패배하고, 불의가 이긴다는 현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대학이 마침내 저를 쫓아내는 데 성공하기 직전에, 패배하지 않고자 대학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이 패배를 이제 끝장내고자 합니다.
청년의 입으로 이 판을 태워버릴 불을 지피겠습니다.
보란 듯이 대학을 박차고 나왔지만 곧이어 생계의 문제가 저를 붙잡았습니다. 고졸채용을 검색하며 토익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때 한 대학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학교본부에 맞서 투쟁하는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너무나 당연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 말았습니다. 싸우고 있는 사람은 ‘김창인’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불안하고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였습니다.
저와 같은 처지의 수많은 청년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토익학원을 그만두고, 전국 각지의 대학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수많은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회가 보지 못하는, 정치가 대변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삶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또 미디어로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투쟁은 현장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온 삶이 투쟁이었습니다. 어느 성소수자 청년은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이 좋아서 이주해온 중국동포 청년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인들이 자신을 얼마나 차별해왔는지 3시간을 넘게 토로했습니다. 자식만큼은 차별받게 하고 싶지 않아 부모라고 선뜻 나서지도 못한다며 그 서러움을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여성들은 안전한 삶 자체에 대해서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공공화장실을 이용하는 것도, 택시를 타는 것조차도 두려움이 앞서야 했습니다. 성폭력 가해자들이 법의 심판에서 살아남는 것을 보면서, 분노와 함께 절망의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청년들 모두가 각자의 공간에서 홀로 싸우고 있을 때, 국가와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연대는 상실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끝끝내 저항하고야마는 청년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항하는 청년들과 함께 이 실패를, 이 좌절을 끝장내야 합니다. 기성 정치가 아무리 ‘청년’을 말해도 우리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직접 책임져야 할 때 입니다.
‘공정’한 세상, 불평등하다면 거부하겠습니다.
‘조국 사태’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를 일깨우는 중대한 계기였습니다.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조국 딸에 대한 전면 조사와 조국 후보 사퇴’를 외칠 때, 소위 학벌이 없는 청년들에겐 이 모든 것이 별나라 이야기였습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당연한 ‘관행’이거나 고작해야 ‘반칙’이었지만, 다수의 청년들에겐 듣도 보도 못한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회의 불평등을 진지하게 따져 묻고 있을 때 돌아온 것은 “합법인데 무엇이 문제냐”, “우리 앞에는 타도해야 할 거악이 있다”는 동문서답뿐이었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말하건대, 정의당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국 사태에 대한 입장 표명을 주저할 때, 우리는 이 사회의 투명인간들과 함께 하겠다는 정당의 모습에서 한발짝 더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상위 10% 동맹’의 성채를 단단히 구축하는 일에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고 대중들은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대중들의 분노에 진지하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주저하게 만든 것입니까.
이 땅의 문제는 불공정이 아닌 ‘불평등’이라고 당당히 말해야 합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선 설령 기회가 평등해도, 과정이 공정하다고 해도 결과는 정의롭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정해준 규칙대로만 살아가면 적절한 보상을 받는 사회가 아닙니다. ‘공정한’ 규칙에 따라 입시와 취업경쟁에서 탈락하면 낙오자가 되고, ‘합법적’ 제도에 따라 성소수자들은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상식적’ 관행에 따라 여성들은 아이가 생기면 회사를 그만두는 세상을 정의롭다 말할 순 없습니다. 그들이 정한 ‘공정’과 ‘합법’과 ‘상식’을 뒤엎겠습니다.
기존의 낡은 진영을 가로질러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길을 내고자 합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세대의 사회주의이자,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입니다. ‘어제의 사회주의’가 이 땅에 남긴 빛나는 성취들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적 이상을 무상의료, 무상주거, 무상교육이라는 슬로건으로 녹여내 이 사회의 평등을 위해 헌신한 진보정당 또한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우리가 가야할 곳을 잃어버린 진보 정당의 모습 역시 존재합니다. ‘어제의 사회주의’가 멈춰서버린 그곳에서 우리는 ‘오늘의 사회주의’를 들고 다시 뛰고자 합니다.
바로 ‘우리 세대’의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IMF부터 세월호까지 위기의 순간마다 국가는 국민을 포기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사회는 언제나 누군가를 외면하거나 배제하곤 했습니다. 그 안에서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낡은 정치는 이를 무시해왔습니다. 기성 정치가 대변할 수 없는 우리 세대에게는 지금, 사회주의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주의입니다. 한 세대가 지났어도 전혀 나아지지 않은 불평등한 시대, 불의한 세상 속에서 다시금 평등과 연대라는 사회주의적 이상으로 우리의 모습을 대전환해야 합니다. ‘범여권’이라는 오명을 쓴 채 함께 낡아가고 있는 진보 정당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쥐고 흔드는 자본과 싸우겠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차별과 싸우겠습니다.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지 못하게 만드는 소외와 싸우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입니다.
그 이상을 위해 싸우는 사람, 김창인의 국회 입성이야말로 진보 정당이 다시 한 번 시대의 어둠 속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결연한 의지의 선언이 될 것입니다. 저와 함께 새로운 세상의 파도가 되어 당당히 앞으로 나아갑시다.